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문단 편집) ===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조지 S. 패튼|후퇴보다 빠른 진격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어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된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간간히 간단한 임무를 뛰며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된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국 [[제82공수사단|82공수사단]] 및 [[제101공수사단|101공수사단]]에 추가로 [[자유 폴란드군]]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 협력해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헴을 장악하여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자는 거창한 작전이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 고향이 그리운 병사들은 물론, 차기 대통령 후보를 노리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에게는 군침을 삼킬만큼 매력적인 대권 보증수표였다. 귀환병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자길 찍어 준다면...]이 걸려 있었다. 게다가 당시 연합군은 이 진격속도 때문에 수송되는 연료보다 더 많이 잡아먹으며 길어진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엔트워프항을 위시한 네덜란드 지역을 일부 장악할 필요도 있었기에 성공만한다면 꿩먹고 알먹기였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프리트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 작전 개시 직전 아른헴 근방에 독일 전차부대의 이동이 확인되었으나 '''지나가는 부대''' 정도로 폄하되며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렇게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헴 주위에 2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친위대 대대가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SS 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 기갑군단으로, 무장친위대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으로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 포위전|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개발살이 나버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 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헴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지 연대 수준도 못되게 짜부러든 전력이었다. 그러니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 SS 기갑군단을 후방인 아른헴에서 보충과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필이면 ''''방어의 사자'''' 모델 원수였다. B집단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 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친위대 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세를 분쇄한다. 반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 기갑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의 지휘 역량까지 더해져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완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 작전의 실패가 더 뼈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이 존나 세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징징대지도 못한다. 거기다 패튼의 부대는 마켓 가든 작전에 보급이 집중되어 프랑스와 독일 국경 근처까지 도착했음에도 멈춰야했다 한편 이 작전의 실패는 훗날 몽고메리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작전 실패 자체도 그렇지만, 몽고메리가 작전이 실패한 이후 '''패배의 책임을 정작 용맹하게 분투했지만 정치적으로 돌봐줄 빽이 없는 외국의 망명 장군에게 몽땅 전가하는'''[* 해당 전투에 참여한 폴란드 공수여단장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패배의 책임을 전가받고 이후 한직을 맴돌다 전후에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살다가 죽었다.'''] '''찌질한 추태'''를 부렸기 때문이며 이후 망명 장군에게 사석에서만 사과하고 그 이후에는 케어조차 안 하였다. 사실 작전에 실패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대원수]]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무적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불패의 상승장군 또한 아주 없진 않으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무수한 침략을 받아온 한반도에서도, 10번 이상의 전투를 진두지휘했고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장수는 [[이순신|딱 하나]]밖에 없다. 그 외에는 한두 번 정도의 전투만 수행했던가, 혹은 소규모의 패배를 당한 후 절차탁마하여 대승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스포츠로 봐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영호의 승률이 71%, 3경기 중 1번은 졌는데도 압도적인 강자로 불린다. 양키스 같은 강팀도 하위권 팀에게 잡힐때가 왕왕 있고...전쟁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보니 온갖 변수가 발생한다.] 알 수 있다시피 전쟁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고 모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약체화된 독일군에게 쳐발린 것도, 고금을 통틀어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이고 당시 독일 측 지휘관인 발터 모델이 겁쟁이나 용렬한 지휘관이 아닌 당대의 손꼽히는 명장이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패전 책임을 외국의 망명 장군, 그것도 허접한 [[똥별]]이 아니라 충분히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던 장군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운 졸렬한 행동은 후대의 사람들이 '군인'을 평가함에 있어 당연히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으며, 때문에 후세의 인물들이 보기에 몽고메리의 평가는 당연히 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성질 더럽기로 몽고메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조지 S. 패튼]]의 경우에도 수많은 실책을 저지른 바 있으나, '''최소한 자신의 실패를 남에게 덤터기씌운 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패튼은 후세의 평가 또한 인성과 별개로 적어도 능력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마켓 가든 작전]]은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을뿐더러 영국 제1공수사단은 사실상 전멸하고[* 이후 다시는 전투강하를 못했다.] 미 제82공수사단도 노르망디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쓸모없는 수십 km의 둑길만 차지하는 참패로[* 후일 몽고메리가 이 작전을 90%의 성공이라 자평한 것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몽고메리가 한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대차게 비꼰 것이 유명한 일화.]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전 부대의 진격이 중지되었고[* 이는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제4화 보충병에서 닉슨이 언급하기도 했으며 모든 전투계획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공수부대의 전투강하는 기습적인 목적이 강하며 또 보급 등의 여러문제로 유럽에서의 연합군의 진격은 멈춰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작전 실패와 더불어 미국 언론들에게 맹렬하게 씹히게 된다.[* 정작 패튼은 보급 정체만 신경썼을 뿐 몽고메리의 실패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논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불똥튈 것을 염려했는지 열심히 몽고메리를 옹호해주기도 했고 '''기껏해야 사단급 출혈'''[* 공수부대가 정예병력이라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공수부대는 공수 작전을 안 하면 일반 보병부대에 비해 약간 높은 전투력 이외엔 특별한 가치는 없다. 공수 훈련에 들어간 비용이래야봐야 요즘 특수부대들처럼 비싼 장비들을 떡칠한 것이 아니기에 비싼 것도 아니었고.]이었기 때문에 넘어가게 된다. 결국 [[라인 강]] 도하라는 작전 목적이 달성된 것은 작전 6개월 이상이 지난 45년 3월, 그것도 패튼의 손에 이루어진다. 이후 연합군은 망명정부 요청에 따라 보급에 중요한 항구인 [[앤트워프]] 해방에 진력했고 캐나다군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스헬데 전투를 통해 강 저편의 독일군을 몰아내며 앤트워프 항 사용이 가능해지며 겨우 보급에 숨통이 트인다. 결국 아른헴이 해방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